<6년 전 알함브라 궁전에서>
요즘 현빈, 박신혜가 나오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이슈인데, 나도 나름 알함브라 궁전에서의 추억이 있기에 여기에다 끄적여 보려고 한다.
때는 바야흐로 2012년 봄, 우리는 결혼을 앞두고 함께하는 첫 유럽여행에 들떠있었다. 오직 스페인에서만 7박 8일간 머무는 일정이었고, 마드리드-그라나다-네르하-론다-세비야-톨레도-마드리드로 이어지는 안달루시아 중심의 여행이었다. 여행 둘째날 그라나다로 이동하기 전에 마드리드에서 레알 마드리드 축구 경기를 직관하기로 했었는데 경기가 밤 12시가 되어야 끝나는 스케줄이라 하는 수 없이 야간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계획했다.
경기 전에 미리 예매해놓은 티켓을 자판기에서 뽑는 중에 누가 뒤에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여행 카페에서 많이 봐왔던 소매치기 사례인 것 같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티켓이 나오자마자 주머니 깊숙히 넣고 자리를 떴다. 스스로가 대견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베르나베우에서 호날두의 그 흔한 "호우" 한 번 못보고 경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후다닥 달려나와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심야의 마드리드 버스터미널>
유럽에서 캐리어 끌고, 큰 카메라를 든 동양인 커플이 야간버스를 타는 건 꽤나 위험한 것 같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이폰으로 GPS를 확인해가며 잠을 설치던 중에 주변에 불빛 하나 없는 휴게소에 정차했다. 운전기사 아저씨의 스페인어를 알아듣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언제 다시 출발하지 몰라 화장실만 다녀와서 바로 차에 탔다. 거기서 버스 놓치면 새벽까지 미아가 될 것 같았기에.
<어딘지 모를 스페인 남부의 휴게소, 새벽 4시경>
그렇게 긴 밤을 달려 그라나다에 도착했는데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새벽녘 그라나다 버스 터미널>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잠시 누웠다가 그나라다의 아침을 느끼기 위해 준비하고 나왔다. 사실 한국에서 생각할 때는 야간버스에서 푹 자고 아침부터 바로 여행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의 불안과 걱정 때문에 생각보다 잠을 많이 못잔 상태로 일정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그라나다의 아침>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놓은 알함브라 궁전 관람을 하기 전에 호텔 근처에서 안달루시아식 아침식사를 먹기로 했다. 빵에 토마토 뭐시기를 얹고, 카페 콘레체와 함께 먹으니 이제야 진짜 스페인에 온 것 같았다. 비몽사몽간에 먹었던 아침식사에 너무 취했던 탓일까. 나는 이후 바로 그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경험하게 된다.
<안달루시아식 아침 식사>
호텔에서 조금 걸어가면 알함브라 궁전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마침 버스가 눈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기분이 좋았던 탓인지 신나게 뛰어가서 버스를 탔더니 이미 만원 버스였다. 소매치기를 대비해 꼭꼭 잠궈뒀던 자물쇠를 풀어 차비를 지불하고 손잡이를 잡고 섰다. 누가봐도 여행객처럼 보이는 우리에게 친절한 스페인 아저씨가 자리를 양보했다. 여자친구를 자리에 앉히고 눈부신 그라나다 풍경을 보며 알함브라 궁전에 도착했다.
Q. 위의 지문에서 작가의 행동 중 잘못된 것은?
A. 자물쇠를 잠그지 않았다(!)
그렇다. 자리를 양보한 사람은 앞에서 시선을 끄는 역할이었고, 뒤에서 자물쇠가 풀린 내 가방에서 지갑을 그대로 들고 간 것이다. 지갑에는 남은 일정동안 쓸 현금경비의 절반과 신용카드, 운전면허증이 들어있었다. 어제의 대견했던 나는 하루만에 똥멍청이가 되었다.
<알함브라 궁전 내부>
알함브라 궁전 관람은 미리 예약해놓은 시간에만 입장이 가능했기 때문에 여자친구에게 질질 끌려 일단 입장했다. 한국 신용카드사로 분실신고를 하며 걸어 들어갔는데 대충 저런 풍경을 지나갔던 것 같다(하지만 기억이 1도 나지 않음...). 현금은 물론이고, 신용카드로 디파짓을 걸어둔 숙소 예약과 국내면허증 없이 렌트카 대여가 가능할지 등등 오만가지 장애물들이 눈앞에 펼쳐졌기에 알함브라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똥멍청이 응징>
<썩은 미소의 그녀>
<영혼 가출 상태>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함브라 궁전은 듣던대로 경이롭고 아름다운 곳이었고, 카메라만 들이대면 작품 사진이 나오는 장소였다.
<반성중>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국의 경찰서에 가서 손짓 발짓으로 분실신고를 했다. 찾으면 연락을 준다고 하여 면허증이라도 되찾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렸으나 연락은 오지 않았다. 마음을 추스리고 알바이신 지구로 건너가 저 멀리의 알함브라 궁전과 푸른 하늘을 바라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어찌됐든 이것도 우리 스페인 여행의 "추억" 중 하나로 여기자고 싹싹빌었다 다짐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지금은 정말로 웃으며 얘기하는 추억이 되었다!
<알바이신에서 바라본 알함브라 궁전>
역대급 여행 경험을 추억하기 위해 알함브라 궁전의 모형을 사왔는데 지금도 내 책상위에 놓여져있다. 가끔 이 모형을 볼 때마다 저 궁전 곳곳을 거닐었던 행복한(?)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알함브라 궁전 모형>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