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여유로운 저녁을 맞이한 김에 기억을 더듬어 2년 전 여행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힘들겠지만.
런던에서의 첫 날은 내셔널 갤러리를 보고, 피카딜리 서커스 인근을 방황하다가 런던 아이를 타는 것으로 무사히 마무리했다.
숙소로 돌아와서 마음에 들었던 그림 엽서를 모던한 액자에 꽂아보고선 흡족해서 찰칵.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두 그림의 공통점이 있다.
여러 사람의 보는 가운데 주인공이 심판받고 있다는 것.
심리검사 중에 그림을 그려서 그 사람의 내면을 분석하는 원리처럼,
나의 그림 취향도 무의식중에 누군가로부터 평가받기를 좋아하는 내 성격이 반영된 것 같다.
성격적 장점인 동시에 단점인데,
늘 주변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원해서 자신보다는 그들을 위해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곤 한다.
단점인 부분은 조금 자제하고 장점을 발전시켜 나가도록 노력중이다.
'유럽 사람들은 밥을 이렇게 먹는구나' 라고 처음 느끼게 해주었던 호텔 조식.
첫 날은 긴장해서 조금밖에 못먹었지만 둘째날부터는 용서가 없었다.
베이컨, 스크램블, 소시지, 버섯, 구운 토마토, 크로아상, 샐러드, 신선한 과일까지 정말 배터지게 먹고,
사과 하나 손에 들고 당당히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와 오렌지주스(말그래도 리얼 오렌지 100%)를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그리고 기대했던 바와 같이 너무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호텔이라
비록 혼자 먹었지만 너무 즐겁고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출근길 우유 한 잔이 전부였는데,
이렇게 멋진 곳에서 요상한(?) 아침식사를 하고 있자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아침을 먹으면서 고민을 정리한 끝에 새로운 이벤트를 추가하기로 했다.
바로 축구경기 추가 관람!!
유럽의 많은 나라 중에 굳이 영국에 온 것은 맨유의 박지성을 보기 위함이었지만,
막상 하루를 여행하고 나니 한 경기만 보고 가기가 너무 아쉬운 것이었다.
'내가 또 영국에 와서 프리미어리그를 관람할 날이 있을까?'
고민은 짧았고 선택은 편했다.
일단 무작정 오늘 아스날 경기가 열리는 Emirates Stadium으로 향했다.
아스날은 엄청난 빅 클럽이지만 북런던의 풍경은 정말 소박했다.
서울에도 '여기가 서울 맞나' 싶은 곳이 있는 것처럼 아스날 인근의 북런던도 그랬다.
낮은 건물들과 한적한 도로, 드물게 보이는 상점들.
그런 소박한 풍경 사이로 생뚱맞게 위치한 꽃 장식.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경기장.
서울에서 상암구장도 가봤었기 때문에 규모에 놀라지는 않았는데,
막상 내 눈앞에 매주 TV로 보던 장소가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믿기지 않았다. (진부하지만 정확한 표현이다)
아직 오전이라 전반적으로 한산했고, 천천히 경기장 구석구석을 구경해보기로 했다.
경기장 주변을 한 바퀴 돌고 기념품샵으로 들어갔는데 너무 많은 물건 중에 뭘 살지가 고민이었다.
이 때는 박주영 선수가 이적하기 전이라 유니폼도 별로였고...
모자나 티셔츠는 입고 다니기가 좀 부끄러울 것 같고...
그러다 찾은 요 녀석!
내 차 옆자리에 앉혀두면 어울리겠다는 생각에 냉큼 집었다.
2년이 지난 지금은 앞자리는 양보하고 뒷자리에 앉아있다.
사진에는 잘 안보이지만 입고 있는게 후드티라 뒤에 모자도 귀엽게 달려있다.
내 차에 타면 그 모자 씌워보는 사람 꼭 있더라.
레전드 선수들의 위용...
아스날 팬은 아니지만 정말 쩔었다 멋있었다.
아스날이 이 경기장을 짓느라 빚더미에 앉고 빅네임 영입도 한동안 못했지만
경기장을 직접 가보니 그만한 가치가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침부터 일찍 방문한 목적을 달성했다.
사실 약팀과의 경기고 대충 싼 뒷자리로 볼려고 간건데... 표가 없었다.
시즌권 구매한 사람이 그날 티켓만 재판매 되도록 내놓은 자리였는데,
생각보다 훨씬 비싼 금액에 망설였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서기는 너무 아쉬워서 결제해버렸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본격적으로 오늘 일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원래는 캠브릿지로 가볼까 했는데 하늘도 꾸물꾸물하고 기차여행을 할 기분이 아니라 과감히 축구로 일정을 바꿨고,
런던에 오면 꼭 가보고 싶었던 세인트폴 대성당과 테이트 모던을 중간에 끼워넣어서 일정을 (5분만에) 완성했다.
내가 처음 가보는 도시에서 가능하면 꼭 가보려 하는 세 곳은 성당, 대학교,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인데,
전날 런던아이를 탔으니 이제 성당을 가 볼 차례였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성당이라는 세인트폴 대성당. (첫번째는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 세번째는 세비야 대성당)
모태신앙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어릴때부터 가톨릭의 영향 아래서 자랐던 탓인지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성당은 꼭 한 번씩 가보게 된다.
그동안 서울과 대구 등 우리나라 각지의 성당들과 일본의 성당 몇 군데를 가봤었는데,
드디어 처음으로 마주했던 가톨릭 본고장(?)의 대성당이었다.
그 규모와 웅장함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만큼 거대했다.
물론 종교시설로서도 의미가 깊지만, 건축물로서도 깊은 감명을 주었던 곳이다.
성당 내부를 구석구석 둘러보며 경건한 마음을 즐기고 난 후 내 관심을 끈 것은,
돔 구조의 성당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는 돌계단이었다.
돌계단을 인내심을 갖고 한참 올라가다보면 성당의 꼭대기가 드디어 등장하기는 커녕 2층의 원형 복도가 나온다.
그 복도에서 다시 또 한참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야 정상에 도착하는데, 생각보다는 조금 초라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성당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넓은 옥상이 있는 구조는 당연히 아닐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잔뜩 흐린 런던 시내를 동서남북 모든 방향으로 둘러 볼 수 있다는 것.
밀레니엄 브릿지와 테이트 모던, 그리고 우중충한 템즈강이 보인다.
너무 더워서 모자를 벗었더니 머리가 엉망이다.
+ 서양사람들은 참 사진 못찍는다.
+ 나 그렇게 돈 밝히는 사람 아니다.
바람이 너무 시원해서 해가 질 때까지 이 곳에서 템즈강을 바라보고 있고픈 마음이었다.
바쁘게 많은 곳을 돌아보는 여행도 물론 좋지만,
이렇게 '사랑하는 곳'을 만들어 오는 여행이 더 뜻깊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템즈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세인트폴 대성당과 테이트 모던.
내가 런던에서 만들어 온 '사랑하는 곳'이다.
특히 테이트 모던 내부의 어느 카페 테라스...
하지만 테이트 모던을 방문하기엔 축구 경기시간이 임박해오고 있었다.
역사 여행은 잠시 pause 걸어 놓고, 축구 한 게임 보고 오기로 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