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개강소감 + alpha

zzun 2007. 3. 7.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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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 후 이틀이 지났다. 지난 2년간 너무나 - 실은 미치도록 - 오고 싶던 학교를 이렇게 두 발로 걸어다니고 수업도 듣고 있지만 내가 기대했던 매우 행복한 그런 감정은 지금 아니다. 물론 예전처럼, 정말로 예전 그대로 기숙사에서 잠도 자고, 학교 식당에서 다른 학생들에 둘러싸여 밥도 먹고, 이어폰을 꽂고 캠퍼스를 거닐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공부도 하지만(이건 예전엔 안하던건데-_-;) 이런 행위나 보고 듣는 것으로 부터 100% 만족하지 못하는 내가 좀 의아스럽다. 무엇이 부족한걸까.

월요일 아침엔 수업 외에 별도로 신청한 영어강좌를 들으러 갔다. 너무 추워서 늘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러 커피샵을 들어갔는데 왠 단정한 여학생이 길을 묻더라. 옷차림은 어른스러웠지만 약간의 불안함과 기대감이 공존하는 얼굴 표정에서 영락없는 신입생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수업시간 때문에 간단히 '걸어가는 것 보다 버스를 타는게 더 낫다'라고만 알려주었는데 나중에 강의실을 잘 찾아갔는지 마음이 쓰였다. 그러면서도 내가 큰 경계심 없이 길을 물어볼만한 사람은 되는구나 라는 안도감이 든 것은 어찌 보면 좀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영어를 공부했다. 영어로 듣고 영어로 말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난 진심으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좋아한다. 금새 질려버리는게 흠이지만 공부는 '끝이 없다'는 면에서 어쩌면 나랑 궁합이 잘 맞다. 나는 일을 하지 말고 공부를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하지만 역시……. 이 강좌는 4월 중순이면 끝나는데 그 이후로도 계속 신청할 것 같다. '할 것 같다'라고 말한 이유는 지금은 머릿 속 언어적 중추가 새로이 활동을 재개한 것이 반갑기만 하지만 이 녀석이 언제 또 지쳐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엔 이번 학기 유일한 교양 수업인 '논리와 비판적 사고'라는 수업을 들었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사회비판적인 과목이었지만 한 학기동안 재미있게 들을 것 같다. 예전에, 스스로를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이런 수업을 들을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었는데…. 어쨌든 오랜만에 머리를 좀 굴렸더니 느낌이 꽤 좋았다.

그리고나서 저녁 식사 후 조금 전까지는 <Grey's Anatomy>를 시즌2까지 마저 다 봤다. 원래는 한 편만 볼 예정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도중에 그만 보게 하지 않더라고. 나는 가끔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나면 등장인물과 나를 자꾸만 동일시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본영화를 보고 나서 잘 하지도 못하는 일본어를 한 동안 입에 달고 다닌다든지, 영화 <Bourne Identity>를 보고 나서는 갑자기 비밀요원 놀이를 한다든지, 뭐 그런 것. 그래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냐면 바로 어른스럽게 생각하고 어른스럽게 말하기를 하고 있다. 일개 드라마에서 어떤 대단한 것을 얻을 순 없지만 <Grey's Anatomy>에서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한 어른스러운 해결책을 종종 말해주곤 한다. 매편 시작과 끝 부분에 주인공 Grey의 나레이션에서도 그렇지만 요즘엔 오히려 O'Malley의 대사에서 그런 것을 더 많이 느낀다. 정확하거나 논리적인 해결책이 아닌 말그대로 어른스러운 해결책. 서로 상처주지 않게,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때론 뜨겁게 때론 차갑게,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이렇게 또 나는 감성적인 인간이 되어 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 머리는 빠른 속도로 잘 돌아가고 있었는데 지금은 돌아가기를 멈춘 채... 뛰고 있다. 마치 심장처럼 뛰고 있다. 이럴 때 스스로에 대한 컨트롤을 좀 더 수월하게 하고자 '논리와 비판적 사고'라는 얼음덩어리 수업을 신청한건지도 모르겠다.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

쓰다가 절반 정도를 날려먹고 다시 썼는데 그 전 글과 느낌이 많이 달라져버렸다.
사람의 머리란... 이 놈의 머리란... 나라는 녀석의 머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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