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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비유학생 체험수기

zzun 2004. 4. 23.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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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비유학(4년)-박사후과정(1년2개월)-직장생활(3년9개월)을 마치고  


등록자 백종범 (38) 조회 3515
수학국가    미국 전공    Polymer Chemistry (고분자 화학)
등록일    2003-11-04 오후 7:13:17 삭제예정일    2004-05-31



저는 93년도 국비유학시험에 합격하여 94년 8월부터 98년 8월까지 박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98년 9월부터 99년 10월까지 미국소재 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은 후 99년 11월부터 2003년 8월까지 미국 국립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9년 수일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지난 8월 말에 귀국하여 9월 1일부터 국내 모 국립대학에서 교편을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경험하신 것들과 제가 경험한 것과는 거의 대부분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와 보니 이미 여러분들께서 좋은 글을 많이 올려놔서 제 글이 여러분들께 특별한 도움이 되리라 곤 생각지 않습니다만, 제 기준에서 절실했던 부분만 몇 가지 글로 올리고자 합니다.

1. 유학준비

(개인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겠습니다) 비록 액수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저한테는 국비장학금이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외국유학이 제게는 사치였거든요. 대학을 가는 것조차도 어려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공부 할 때는 쉽게 돈벌 수 있는 과외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돈을 벌면서 대학 다니는 것은 부모의 도움이 없이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방학이면 막노동부터 학기 중 파출소에서 심야 방범대원 등으로 용돈과 학비를 벌었습니다. 물론 아무리 아껴 모아도 학비는 충분치 않아 부족한 부분은 부모님과 어렵게 살고 계시는 형제들께서 도와 주셔서 겨우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대학 3학년 때 다행이 국내 대기업에 인턴사원으로 채용 되 졸업 후 입사를 조건으로 소액의(지금생각으로) 학비보조를 받았습니다. 매달 용돈으로 2만원 정도 밖에 지출 할 여력이 없던 저한테는 꽤 많은 액수였기에 적립이 가능했습니다. 대학교 4년 때 취직은 되어 있고 약간의(일 백 만원 미만) 돈은 있고 해서 이 돈으로 세상 경험이나 하자해서 왕복 비행기표 한 장 달랑 들고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여름방학 두 달 동안 개인적으로 해외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이 것이 제가 계속 공부하게된 동기를 부여해 줬습니다. 왜냐고요? 모 기업회장님이 쓰신 책 중에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몸으로 체험했으니까요. 하루하루 어떻게 살까 고민하기 바빠 내가 살고 있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 우물안 개구리처럼 살았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준비해서 좀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를 해보자고 결심을 했고 준비기간을 가지기 위해 부랴부랴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습니다. 다행이 제가 대학원 진학하던 바로 전해에 과외 금지가 풀렸기 때문에 조금은 여유 있게 대학원 생활과 유학준비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대학원 졸업하던 93년 초에 미국 몇몇 주립대학에서 입학허가는 받았지만, 가진 것이 없어 그 해에 갈 수가 없었고 입학을 연기했습니다. 다행이 그 해(93년)에 국비유학시험에 합격하여 94년 여름에 미국에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2. 유학생활 (1994.8-1998.8)

약 여섯 개의 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았지만, 그 중에는 공부마칠 때까지 자비로 공부하겠다는 서약서를 먼저 보내와 여기에 서명하여 보내주면 I-20를 보내주겠다는 대학도 있었습니다. 학비와 생활비를 보조해 주겠다는 대학은 학비가 무지 비싼 명문 사립대와 학비가 싼 주립대 두 곳이었습니다. 이 두 대학을 두고 어딜 갈까 고민을 했습니다. 비록 학비와 생활비를 학교에서 보조를 받는다고 합니다만, 국비장학금으로는 명문 사립대학이 소재한 지역에서, 현실적으로 집에서 재정보조 없이 버티기가 힘들다고 여겨졌기에 학비가 싸고 생활비가 적게드는 오하이오 소재 주립대로 결정했습니다. 그때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잘 모르고 제 짐작과 주위 조언을 통해 내린 선택이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것이 제가 학위를 마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혹 여러분 중에 경제적 여력이 되지 않더라도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자 하는 분들께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행이 입학을 하고 보니 제가 다닌 대학은 제 전공분야 특성대학으로 주변 지역에서 관련있는 군 소기업들과 주 정부 막대한 후원으로 대학원생 전원 (국비, 회사 비, 자비 관련 없이)에게 일괄적으로 학비면제와 심지어 주차비까지 학교에서 지불 할 정도로 재정적인 여력이 풍부한 대학이었습니다. 또 지도교수님께서 RA로 연간 $16000+을 지급하셔서 국비를 포함해서 연간 소득이 $30000이 넘었기에 IMF 기간에도 어려움 없이 공부에만 전념 할 수 있었고 4년 만에 무사히 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4년 차에는 국비지원은 이미 끝이 났고 (3년간 지급), 학교에서 지급하는 RA와 그간 조금씩 여유 있을 때 (첫 3년간) 모은 자금도 바닥이 났습니다. 그래서 학비(무료)이외에 4년 간 들어간 비용을 합해보면, 출국시 막 노동 등으로 저축한 돈과 친지들로부터 받은 학비보조금을 합해서 가져간 초기 정착자금 $4000을 포함해서 약 $100000+이었던 것 갔습니다. 그 사이에 처와 딸이 생겼습니다. 본국에서는 단 $1의 지원도 없었고 연로하신 (~80세) 부모님 용돈으로 $1000+를 본국에 송금한 적은 있습니다.

제 경우는 아주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재정적으로 순수하게 국비에만 의존하기에는 년 간 국비지급액수가 작고 국비 지급기간(3년)이 현실적으로 학위를 취득하는데 걸리는 기간과는 너무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연간 국비 지급액은 아주 학비가 저렴한 주립대 학비 충당하기에도 부족한 액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박사과정을 3년에 마치는 사람도 가끔씩 있기는 합니다만 평균 4년 이상이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지급기간이 최소한 4년 이상이어야 할 것 갔습니다. 우리보다 국력이 약한 태국도 4년 간 $100000을 지급하는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15년 이전에 책정된 금액을 지급한다고 하니 너무나 현실과는 맞지 않고 국비유학이라는 의미도 상실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유학하는 동안 만난 자비유학생들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액수인 것 갔습니다. 머니머니해도 Money가 걱정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들 중 하나인 것 갔습니다. 당국에서는 차라리 각 지역의 생활비와 각 학교의 학비를 고려해서 실비로 지원 해 주시는 것도 우수한 인력을 국가에서 양성하는 취지에서 볼때 바람직 할 것 같습니다.

3. 박사후 과정 (1998.9-1999.11)

박사후 과정은 학위를 마쳐 가는 시기에 본인이 관심 있는 분야에 계시는 유명한 교수님들이나 대형연구소 연구원들과 교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박사후 과정을 하실 경우 연구실적을 올리기가 용이한 반면 재정적으로 많이 어려운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경우는 본인이 장래 희망하는 직업에 따라 현명하게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경우를 예로보면, 1년 약간 넘게 학교에서 박사후 과정을 하면서 카드 빛이 약 $10000까지 늘어났습니다. 왜냐하면 부양해야 할 가족이 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일반적으로 지급하는 박사후 과정의 연봉은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보통 학교에서 지급하는 연봉은 그 지역 실정을 고려하여 혼자 살기에 충분한 비용을 지급하기 때문에 가족이 생활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우수한 교수님과 박사후 연수 과정을 경험하고자 하는 분 중에 가족이 있는 분은 집안 혹은 국가에서 보조가 필요한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연봉이 두 배 이상인 국립연구소나 기업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경험하시는 것도 재정적으로는 훨씬 유리하고 거대한 조직속에서 생활하면서 아주 폭 넓은 경험을 하기에도 좋은 것 같습니다. 또한 이들이 추구하는 연구의 목표와 방향을 거시적으로 파악하기에는 최고인 것 같습니다.

4. 직장경험 (1999.12-2003.8)

다행이 제가 학위과정 중 수행한 연구분야가 미국 우주항공국(NASA) 관련분야였기에 쉽게 그곳으로부터 일자리를 제안 받았습니다. 동시에 다른 국립연구소에서도 일자리를 제안 받아 여러 여건을 종합한 후 후자를 선택해서 약 4년 간 근무하면서 박사후 과정을 학교에서 수행하면서 발생한 빛도 정리하고 여력이 있는 자금으로 조금씩 연금도 들고해서 여유 있게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안정된 직장에 먹고 살 만큼 연봉도 받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귀국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제가 소속된 연구분야에서 연속 3년 최고 실적을 올려도 외국인인 경우에 그 실적에 상응하는 승진이나 보상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거대조직에서 외국인으로서의 한계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국을 결심했습니다. 여하튼 이 기간동안 거대 조직내에서 값진 많은 경험도하고 둘째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5. 귀국 (2003.8-)

귀국을 하여 일가 친지 친구들을 만나니 저더러 세상을 거꾸로 산다고들 하더군요. 요즘 교육문제로 외국이민이 유행인 시기에 가족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 왔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남의 밥에 콩이 더 커 보인다고 체험하지 않고 막연한 상상만 가지고 어떤 사회를 동경하는 것은 위험 한 것 갔습니다. 미국이 교육 선진국임에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타국에서 소수민족이 뿌리를 내리고 자기성찰을 원만하게 이루면서 살아가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도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들면, 그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동남아인들이 받는 설움을 생각해 보시면 다소 이해가 갈 것입니다.

6. 글 후미

제가 나고 자란(아직 부모님께서 살고계심) 산골 고향에서는 제 가방 끈이 제일 깁니다. 9년여 미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처음 맞는 추석에 고향을 가니 이장 님께서 산골 마을의 영광이라며 플랜카드를 걸어 주셨더군요("본동 출신 백종범의 박사학위 취득과 XX대학교 교수부임을 축하합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초등학교 (국민학교, 제가 어릴적 표현) 2학년 때 전기가 들어온 산골에서 나고 자라서 외국까지 가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을 축하 한답니다.

부족한 저에게 공부 할 기회를 준 교육부와 교육부 담당자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말없이 묵묵히 내조해준 집사람과 늘 기쁨을 주는 아이들,끝없이 후원해 주신 부모님, 형제, 일가, 친지, 친구, 지도 교수님, 그리고 (미국)직장동료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출처 : http://yuhak.ied.go.kr/space/kookbi/sugi/kookbi_sugi_list.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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