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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음식, 정말 싫다
‘다 같이 고생해서 서로 위로받자’라는 버거운 결론 대신 ‘다 같이 고생은 그만두자’ 라는 결론은 왜 안되나. 껍데기만 남은 상징, 추석상을 왜 엎어버리지 못하는가?
올해는 추석이 예년보다 몇 주 빨리 찾아왔다. 당연히 하나도 반갑지는 않다. 결혼 후 비교적 자유롭게 살아오긴 했으며 심지어 기혼자의 여유를 즐기기까지 했지만 명절만큼은 다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4일이나 통째로 빈둥거릴 수 있는 가을 휴가였던 추석은 결혼과 동시에 ‘이날 만큼은 며느리의 온갖 고전적 의무에 충실해야 할 날’로 시어머니에게 차압당하고 말았다.
첫 번째 날은 세계에 유래없는 민족 대이동에 합류하느라 반나절 동안 지방 출신인 남편 원망. 두 번째 날은 먹지도 않는 부침개 부치고 시어머니 정치평론 들으며 송편 빛느라 차압. 세 번째 날은 아침먹고 설거지, 점심먹고 설거지. 저녁먹고 설거지. 네 번째 날은 마찬가지로 귀향하며 남편 원망. 아무리 늦게 내려가 빨리 일하고 서둘러 올라온다고 해도 심리적인 시간은 한 달은 되는 것 같다. 명절, 정말 싫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여자들은 백이면 백 모두 추석을 싫어한다. 그리고 여자들의 추석 혐오의 중심, 그 지긋지긋한 명절 노동의 중심에는 추석 음식이 있다. 직장 선후배 중에는 이제 초짜 새댁부터 시어머니뻘까지 되는 다양한 등급의 주부들이 있으니, 추석때가 가까워지면 옹기종기 모여 추석 음식 준비에 얽힌 괴담이 오고간다.
가령 선배 중 하나는 손 큰 시어머니 밑에서 일하기가 너무 고달파서 얕은 꾀랍시고 “어머니~ 비행기표가 없어요” 하고 혀 쏙 내밀며 추석 전날 늦은 밤에 도착했단다. 그러나 이게 웬걸. 그 선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자기몫으로 배당된 시금치 한 푸대였다.
맏며느리 역할을 맏고 있는 다른 선배는 ‘어떤 동서가 음식 준비를 하고 누구는 얼마를 냈나’ 라는 주제로 매년 명절마다 분개하고 있다. 가령 ‘일 하나도 안하고 늦게 올라온 주제에 돈 오만 원 달랑 내놓더라’ 라던가, ‘고기 사온다고 해서 다른 것 다 봐주었더니 싸구려 수입 소고기를 사왔더라’ 라던가 말이다.
아무리 맘 좋은 시댁식구 만났다는 복 많은 며느리라 해도, 인심좋은 시어머니 덕택에 부침개 한 종류에 한 광주리씩 부쳐내고 있다보면 ‘저 인간이 이짓 시키려고 나에게 결혼하자고 했나’ ‘뭣 때문에 고등교육은 받았는가’ 등등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마련이다. 더욱이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배 하나에 팔천 원씩 한다는 섬뜩한 이야기까지 떠돌고 있으니 명절이 아니라면 안사먹고 말겠건만, 전통에 반발할 용기도 없는 평범한 아줌마들에게 추석 상차림은 가뜩이나 빠듯한 살림에 순도 높은 재앙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가만 앉아서 받아 먹는 쪽에서는 추석 음식이 반가운가? 반대로 수용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도 추석 음식은 상당한 재앙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단 양이 너무 많다. 한 먹을 것 밝히는 이로서 자신있게 말하자면 추석음식은 어머니가 요리하고 있을 때 옆에서 하나씩 낼름 낼름 집어 먹는 것이 제일 맛있고, 일단 조상님 상에 오르고 난 후 부터는 현저히 맛이 떨어진다. 우리 시어머니조차 그것 참 이상하지? 라면서 남은 음식을 몽땅 싸주시는 걸 보면 분명 나만의 생각은 아니리라. 게다가 우리 친정 어머니는 유난히 손이 크신 관계로 나의 유년시절 명절은 온통 포스트-명절의 남은 음식 처분하기에 대한 서글픈 기억으로 얼룩져 있다. 어린 시절 이후 내가 명절 연휴에 가장 먹고 싶은 음식 1위는 라면이었다.
어떤 여성지에는 분명 ‘추석때 남은 부침개로 전골 만들기’라는 꼭지가 실리기도 했었는데, 사실 남은 부침개로 만든 전골처럼 먹기 괴로운 음식은 없다. 아무튼 그렇게라도 모두 처분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추석이 몇 주 지나면 냉장고 속에서 꽝꽝 얼은 송편과 쉰내나는 부침개의 처분작업이 이루어진다. 결국 그 처절했던 가사노동의 몇분의 일인가는 음식물 쓰레기로 전락하는 것이다. 직장 다니는 며느리들의 피같은 시간 일부는 이렇게 쓰레기통에 가차없이 버려진다.
추석 음식의 또 다른 싫은 점은 메뉴가 당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금이라도 칼로리 낮은 걸 먹어야 하는 입장에서 기름 자글자글한 부침개는 최악이다. 그밖에 생선포라던가, 미끈미끈한 송편, 꼭지 도려낸 과일이라던가 하는 쪽도 만만치 않다.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닌데 대추며 깐 밤은 왜 놓는 걸까? 평소에는 어디서 사려고 해도 잘 안보이는 알록달록한 과자는 또 어디서 나왔을까?
길게 생각할 것 없이 이 음식상은 적어도 100년 전에는 최고의 잔치상이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지만, 조상들은 일년에 몇 번 명절이 되면 이런 내용의 상을 차려놓고 맘껏 먹고 마셨다. 그 조상들도 나처럼 명절 음식이 싫었을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기름기가 부족한 식단에 부침개는 최고의 별미였을 것이 분명하고, 밤과 대추도 조상들의 일상생활에서는 너무나 가까운 먹거리였을 것이다.
당연히 있는 집일수록 풍성하게 많이 장만해서 널리 나누어 주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 햇곡식과 햇과일이 지니는 의미는 ‘상징’이라 부르기에도 너무나 직접적이고 와닿는 것이 아니었을까? 홍동백서니 뭐니 하면서 골치 아프게 예법을 따지는 와중에도 아무튼 이 메뉴는 최고의 상차림인 동시에 가장 강력한 부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농경민의 생활을 하지도 않고, 와닿아 하지도 않는 오늘날 우리에게 추석 상차림을 좋아해 보라는 것은 가혹한 요구가 아닌가 싶다. 며느리들이 시집가서 그 집 밥 축내면서 사는 것도 아닌데 명절마다 일방적으로 시댁에 불려가 중노동을 하라는 것은 분명 불만을 자아내기에 분명하고, 먹을 것도 없고 돈만 많이 드는 추석 상차림을 고분고분 차려내라는 것도 무리한 요구이다. 게다가 식생활이 완전히 달라졌으며 농사에 종사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햇곡식으로 조상님께 예를 올리는 것도 어쩐지 껍데기같아 보인다.
여성 민우회의 추석과 관련된 여론 조사에 의하면 ‘맛있는 음식이 있어서 추석이 즐겁다’는 이들은 남녀 모두 10% 정도라고 한다. 요즘 매체에서는 ‘명절 스트레스’라는 이름을 붙여‘남자들도 일 도와주자’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지만 이것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남자들도 엄연히 장시간 운전과 와이프의 잔소리의 희생자가 아닌가.
‘다 같이 고생해서 서로 위로받자’라는 버거운 결론 대신 나는 ‘다 같이 고생은 그만두자’ 라는 결론은 왜 안되나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명절을 말 그대로 ‘명절답게’ 즐기기만 하며 다같이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보낼수는 없는가라는 이야기이다. 만악의 근본인, 껍데기만 남은 상징인 추석상을 왜 엎어버리지 못하는가?
2000년전 예수님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속죄양 의식을 상징적인 의식으로 바꾸었다. 고대의 동물 희생의식이 유목민 문화가 사라져가면서 자연스레 자취를 감추어 간 것이다. 따라서 농경문화의 상징인 추석상도 이제 사라져 갈 대목이 거의 다가온 것 같다. 과도기적 현상이겠지만 15만 원가량 하는 ‘추석상 세트’가 불티나게 팔려나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주요 고객은 아직은 전통 문화에 미련이 남은 30대. 모르긴 해도 현재의 20대, 10대가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되면 추석상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지도 모르겠다.
“이런! 추석상을 돈주고 산다고?” 라며 끌끌 혀를 차는 어른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지만 어떻게 합니까. 그게 역사의 흐름이 아닌가요?
박유신 hoogh@lycos.co.kr
2003-09-09 14:52:00 [자료제공 : 컬티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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