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북/스포츠

메이저리그 선구자의 시련과 응전

zzun 2003. 6. 14. 20:06
반응형
메이저리그 선구자의 시련과 응전
-다시 도전자 박찬호로 돌아오라-

이준목 기자



10승 11패, 방어율 6.06

지난해 5년간 6500만 달러라는 거액을 받고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한 코리안특급 박찬호의 2년간 성적이다. 중간계투나 패전처리의 기록을 연상케하는 암담한 성적에, 그나마 잇달은 부상으로 올시즌 완전 종료 가능성까지. 아무리 10년간 지켜온 게 '박찬호=우리편'이라는 공식이라고 해도 너무한다는 느낌이 들 만하다.

현재 박찬호의 닉네임은 에이스도 코리안특급도 아니다. 댈러스 지역언론에서는 그를 '먹튀(먹고튀자)'의 상징으로 취급한다. 성적이 안좋아지니까 마이너리그에서 밥을 사지 않았다는 둥, 동료들과 융화하지 못한다는 둥, 사실관계도 명확하지 않은 인신공격적인 비난이 판을 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찬호가 자초한 일이다. 성적으로 모든 것을 평가받는 프로의 세계에서 부상조차 핑계가 될 수 없다. 부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도 선수의 능력이다. 더구나 부상이 고질적이라는 걸 숨겨온 지 2년이 넘었다는 사실은 결국 FA 계약 때문에 몸을 돌보지 않고 혹사한 피로의 후유증을 너무 늦게 고백한 것이었다.

박찬호의 성격은 예민하고 소심하다. 그는 언제나 한 박자 주저하다가 종종 타이밍을 놓친다. 야구를 할 때도 승부를 망설이다 볼넷을 내주고, 장기 계약을 할때도 에이전트(스캇 보라스)의 말에만 휘둘리다가 정든 팀을 떠나야 했다.

심지어 부상을 고백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항상 타인앞에서 솔직하게 의사표현을 하는데 서투르다. 영어를 잘 하고 못 하고의 차이가 아닌 문화와 사고방식의 차이다. 은연 중에 약한 모습을 애써 감추고,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는 것을 미덕처럼 여기는 사고가 오히려 문제를 크게 확대시킨다.

몸 상태가 완전하지 못하거나, 자신이 없으면 솔직하게 양해를 고백해야 하는데 그는 묵묵히 참고 나서다가 부진을 거듭하고, 도저히 완되겠다 싶을 정도가 되어서야 뒤늦게 이야기한다. 그 상태가 되도록 참고 던지느라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프로 무대에서는 그런 게 미덕이 될 수 없다. 그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뒤늦게 진실을 파악한 구단은 그저 황당하고 박찬호라는 양치기 소년의 뒷북에 우롱당했다는 느낌밖에 가질 수 없다.

박찬호에 대한 추억

지금 메이저리그는 그의 뒤를 잇는 후배들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무대를 빛내고 있다. 이미 박찬호에 앞서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경험했던 김병현(보스턴 레드삭스)은 물론이고 떠오로는 샛별 최희섭(시카고 컵스), 서재응(뉴욕 메츠) 등등 올해는 코리안 메이저리거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화려한 해다.

그러나 그 속에 박찬호의 모습은 없다. 오히려 후배들의 빛나는 활약속에서 상대적으로 박찬호의 초라함만 더 부각되는 느낌이다. 성격 급한 사람들은 벌써 '박찬호의 시대는 끝났다.'고 공공연하게 단정짓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박찬호라는 야구선수의 가치가 단지 그것밖에 되지 않았던가? 여기서 잠깐 5~6년 전의 해묵은 감상을 한번 되살려보자. 94년 스물 두살 어린 나이에 메이저리거의 꿈을 안고 태평양을 건넌 부리부리한 눈매의 청년이 하나 있었다. 공은 빠르지만 제구력은 엉망진창에, 동기생인 조성민이나 임선동보다도 한수 아래로 일컬어지던 그저 그런 투수였다.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오겠지 하는 냉소섞인 예상과 주변의 편견을 딛고 마침내 한국인 메이저리거로 첫 승을 올린 96년 4월7일(시카고 컵스전), 언론에서 '월드컵 1승과 맞먹는 감격'이라고 호들갑을 떨던 날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 해 중간계투로나마 첫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승격한 그가 거둔 승수는 5승(5패)에 지나지 않았지만, 팬들은 그를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영웅으로 기억했다.

그가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에서, 다시 풀타임 메이저리거, 풀타임 선발투수, 명문팀의 제2선발로까지 드라마틱한 성공기를 이뤄내던 시기인 96년에서 98년. 당시 한국은 IMF 환란과 정리해고, 정권교체 등으로 한창 암울하고 어수선하던 시국이었다.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메이저리그를 중계해주던 i-TV를 통하여, 5일마다 한번씩 새벽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박찬호 선발경기는 지친 국민들에게 잠깐동안 삶의 여유를 되찾아주는 청량제 같은 역할을 했다. '삼~진입니다!'를 소리치는 캐스터의 요란한 멘트 만큼이나 역동적인 포즈로, 주먹을 움켜쥐고 포효하던 그의 초창기 모습은 열정 그 자체였다.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로 기억되는 차범근 사단의 한일전 대역전승과 월드컵 진출, 그 중심에 있던 당시 차범근 감독의 축구 신드롬과 더불어,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야구는 당시 한국인에겐 기쁨주고 사랑받는 최고의 오락 그 자체였다.

월드컵 본선에서의 부진으로 그저 실패한 감독처럼 낙인찍혀버린 차범근처럼, 박찬호 역시 한 두해 부진으로 그의 야구 인생마저 부정당할만큼 변덕스럽고 냉혹한 세계에 살고있다는 것은 불행한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스타를 가질 자격은 무엇인가

박찬호는 영웅이 아니다. 그저 대중에게 노출된 직업을 가진 사회인일 뿐이다. 우리는 그를 스타라고 부르며, 스타는 늘 팬들에게 갈증을 유발하는 존재다. 스타가 이루는 것에 따라 팬들의 기대치도 점점 높아진다. 스타의 몸값이 한번 올라가면 좀체 내려오지 않는 것처럼, 팬들의 기대치 역시 한번 높아지면 절대 다시 낮아지지 않는다. 그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올라서는게 스타의 숙명이다.

그러나 종종 팬들이 먼저 스타에게 충실하지 못하다. 특히 스타의 시행착오에는 대단히 민감하다. 조금만 부진해도 '한물 갔어'라는 말이 쉽게 나오고 새로운 스타들에게 시선을 빼앗긴다. 경기에 부진하면 스타의 인간성과 사생활에 문제가 있는 거고, 돈을 많이 벌은 것이 불만이 되고, 악성 루머도 모두 현실이 된다.

박찬호는 지금 그러한 상황에 있다. 시즌 초부터 박찬호의 부진 원인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던 수많은 사람들을 한번에 침묵시키는 그의 대답은 간단하다. 구속? 제구력? 근성부족? 한마디로 '몸이 아프거든요.'이다. 어쩌겠는가? 미련하게 아픈 몸을 억지로 혹사시켜왔으니 구속이 나올리 없고, 제구력이 먹힐 리 없고, 정신상태도 느슨하게 풀어질 수 밖에 없다.

이미 최악을 맛본 지금, 앞으로의 박찬호는 다시 일어설수 있을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찬호형의 부활을 믿어요' 따위 감상적인 멘트를 날려봤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지금으로선 어떤 전문가라도 박찬호의 미래를 장담할수 없다.

그는 더는 미래가 촉망되는 유망주도 아니며 서른을 넘겨서 머지않아 노장으로 접어드는 중견 선수다. 막말로 이 상태가 계속되면 어느 텍사스 팬의 비아냥처럼, 마이너리그가 아니라 한국으로 돌아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바라는 부활은 더이상 미디어의 단골 멘트처럼 20승 투수니 내년엔 사이영상 따위니 하는 엄청난 기대가 아니다. 그저 박찬호라는 이름이 영원한 메이저리거로서 남기를 원한다.

예전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5일에 한번씩 등판 일정을 거르지 않고 나와서 새벽잠을 설치게 하던 찬호, 삼진을 잡고 나서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던 근성있는 찬호, 경기 후 인터뷰에서 슬슬 혀가 꼬여가는 발음으로 '팬 여러분께 감사드리고'를 밝은 얼굴로 이야기하던 찬호를 다시 보고 싶다.

그는 누가 뭐라해도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다. 그가 한이닝 연타석 만루홈런으로 기억되든, 배리 본즈의 홈런 신기록 제물로 기억되든. 최악의 상황인 '돈만 비싸게 받아먹고 배째라던' 선수처럼 기억되든 간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한국인에게 메이저리그라는 벽을 넘을수 있다는 희망을 열어준 선구자라는 사실이다.

지금 차세대 유망주가 되어 메이저리그를 누비고 있는 박찬호의 후배들은 모두 박찬호를 보고 희망을 가졌고, 박찬호를 넘어서기 위하여 도전해 온 선수들이다. 그들에게 꿈이 되어주고, 대중에게 희망이 되어주었던 그 사실만으로도 박찬호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는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그가 포기하지 않았다면, 이제는 우리가 그의 야구 인생을 좀더 너그럽게 지켜보면서 묵묵한 성원을 보내줄 때다.  

2003/06/14 오후 3:43
ⓒ 2003 OhmyNews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