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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언제 어디서 찍은걸까? 좀 길고 지루하더라도 도착 첫 날 고생한 사연을 일단 얘기하고 싶다. 그래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결국 한 시간 늦게 밤 10시쯤 도착한 런던. 난 왜 런던 지하철은 밤새 다닐거라고 생각한걸까 자책하는 마음과, 입국심사가 까다롭다던데 오래 걸리면 노숙이라도 해야하나 걱정하는 마음이 뒤섞여 있었다. 나보다 앞에 있던 중국인 가족은 영어를 못하는지 매우 오랫동안 심사를 받아서 더 긴장하고 있었는데 나에겐 고작 묻는다는 게 어디를 관광할거냐였다. 도착하던 그 순간까지도 거의 무계획 상태였기 때문에 급히 생각나는 웨스트민스터를 얘기했더니 5일동안 그거 밖에 안볼거냐고 웃으며 되묻는다. 런던아이도 보고 축구도 볼거라고 했더니 좋은 여행 하라고 얘기해준다. 휴.

그때 긴장이 풀리면서 오히려 호텔까지는 무난히 도착할 수 있을거란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 화근이었다. 일단 목적지까지 가는 지하철 티켓을 사고 여유롭게 탑승했다. 엄청나게 복잡한 도쿄 전철도 자유자재로 타고 다녔으니까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는데 맙소사, 막차시간을 신경쓰면서 환승하다가 반대방향으로 타버렸다. 급히 내린 역에는 손님은 단 한 명도 없고 청소하는 직원 뿐이었다. 반대방향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되냐고 물어봤지만 청소원은 지하철 노선을 모른댄다. 충격.

우여곡절 끝에 반대방향 지하철을 탔지만 첫 유럽, 첫 날, 지하철 한 칸에 외국인 한 두명과 함께 타고 있으니 마음이 편할리가 없었다. 안내방송에서 이 열차는 막차이고 내가 원하는 목적지까지는 안간다고 하길래 다른 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내렸다. 위기의 순간이라 그런 말도 들렸나보다. 그런데 오 마이 갓, 내가 타야 할 노선이 없다. 여기 이 라인으로 갈아타려면 어디로 가야하냐고 직원에게 물었더니 역 바깥으로 나가서 길을 건너면 역이 보일거란다. 영국인의 환승이란 이런 것이었나? 밖을 나왔더니 어두컴컴한 밤 12시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그러고보니 런던 도착 후 처음으로 본 하늘이었다. 그 시급한 판국에 그래도 사진을 한 장 찍었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지웠다.

길을 건너 들어간 고풍스러운 모습의 역에서는 개찰구를 통과하기도 전에 제지당했다. 오늘 열차 운행이 끝났댄다. 웃음이 나왔다. 난 왜 런던까지 와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 건가. 정신을 차리고 버스정류장이 보이길래 일단 노선도를 확인했다.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멋지게 옷을 차려입은 훈남이 있길래 목적지를 얘기했더니 자기도 모르겠다고 지하철역 직원에게 물어보란다. 나를 데리고 지하철역 근처까지 가서는 저기가 입구라고 알려준다. '알아요. 방금 거기서 나왔거든요.'라고 속으로 얘기하고 있으니 길을 가르쳐주지 못해서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그가 나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직접 겪은 첫 '서양 문화'였다.

다시 그 역으로 돌아왔더니 직원이 바뀌어 있다. 여기 어떻게 가냐고 또 물었다. 영어가 조금 입에 붙었다. 지하철은 끝났고 심야버스가 있는데 역을 끼고 돌아가면 보일거란다. 아! 심야버스가 있다고 여행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났다.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 나의 첫 유럽 첫 날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 있었다. 심야버스 노선도를 뚫어지게 보면서 분석(그나마 내가 잘 하는 것)한 결과 타야할 버스 번호를 알아냈다. 다행히 정류장에 사람이 많았다. 버스 도착시간이 조금 남았길래 정류장을 둘러보며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한 장의 사진에 대한 스토리치고는 너무 길지만 그래도 이렇게 써 놓으니 속이 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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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Victoria Station을 지나 드디어 St. James's Park 근처에 도착했다. 급히 아이폰을 켜서 GPS를 확인했더니 호텔 위치가 보인다. 호텔 이정표를 발견한 순간 정말 눈물이 날 뻔 했다. 새벽 1시의 모습이라 조금 공포스럽기는 했지만 일단 사진을 한 장 찍고 안으로 들어가니 직원이 반갑게 맞아준다. 이름을 얘기하니까 이미 하루가 지났다고 농담을 걸어줘서 기분이 조금 풀렸다.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나니 온 몸에 힘이 쫙 빠졌다. 샤워를 하고 TV를 보면서 다음날 일정을 고민하다 보니 새벽 2시가 넘어 있었다.

3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에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글이나 사진으로 기록해놓진 않았지만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세세한 장면까지 기억해낼 수 있는 건 그만큼 강렬한 경험이었기 때문인듯 하다. 지금은 이렇게 장난처럼 얘기할 수 있지만 그 순간에는 정말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했었다.

'낯선 곳에 나를 온전히 던져보자'라던 여행의 목표는 그렇게 도착 3시간만에 달성해 버렸다. 그래서 목표를 조금 수정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작은 것 하나까지 가슴에 새기며 여행하자.'라고. 여행책과 지도를 덮고 모든 선택을 다음날로 미루고서는 새벽 3시에 드디어 침대에 누웠다.



※ 여행기를 자꾸 미루면서 쓰다보니 글의 성향이나 글투가 일관성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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