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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란 책을 처음 만났을 때, 꼭 이 사진처럼 생긴 표지를 보고 갑자기 가슴이 막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여행을 떠나는 날의 아침은 많이 바쁘고 정신이 없지만, 그 '설렘'은 가치를 매길 수 없을만큼 소중하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 여정을 설명하는 기장님의 목소리를 들을 때, 승무원에게 짧은 영어로 부탁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창 밖으로 구름을 내려다 볼 때, 지금 내가 일상을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있음을 실감하곤 한다.

작년, 그리고 재작년 일본을 두 번 다녀오긴 했지만 유럽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언어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모든 문화가 다른 낯선 곳을 아무 동행도, 가이드도, 겁도 없이 혼자 열흘이나 돌아다녔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대신 그만큼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온 것 같아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왔지만 막상 여행기를 '써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니까 부담스러워서 그동안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4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첫 글을 쓰고 있다.

유럽을 가고자 하는 욕심으로 조금 길게 휴가를 얻은 올 여름, 내게 주어진 날은 11일이었다. 사실 한 국가도 다 둘러보기 벅찬 일정이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아쉬운 마음에 두 나라를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목적지 결정은 의외로 쉬웠는데, 우선 가장 가고 싶은 나라였던 영국이 1순위, 그리고 영국에서 가장 가까운 프랑스를 2순위로 선택했다. 2월쯤 일찌감치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잠시 귀차니즘에 빠져 있다가 5월쯤 숙소와 유로스타를 예약했다. 그때 이미 예산의 상당 부분을 지출해버린 상태였지만 '처음'이라는 설렘 때문에 돈 걱정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따뜻한 봄 날씨를 만끽할 틈도 없이 일에 치여 살다가 어영부영 다가온 8월. 떠나기 일주일 전에야 여행책을 구입하는 게으름뱅이 주제에 친구에게 '아직 계획도 못 세웠어. 어떡하지...' 라고 투정아닌 투정을 부리고 있던 나였다. 하지만 나의 무계획적인 삶이 친구에 의해 신나게 비판받고 있을 때 난 오히려 희열 혹은 자부심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는 다람쥐 같이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최소한의 자유는 지키고 있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자부심. 입사 후에 부족한 형편에도 매년 여행을 떠나는 것도 그런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긴 서론은 이만 접고 여행기를 시작해야겠다. 역시 1급 귀차니스트 답게 출발 전날 밤에 부랴부랴 짐을 싸기 시작해서 결국 당일 새벽 3시쯤 짐을 다 쌌다. 몇 시간 쪽잠을 자고 서둘러 공항에 도착했더니 출발 20분전이라고 뛰어가라고 승무원이 얘기해준다. 언제나 스릴 넘치는 내 인생에서 이 정도 긴장감 쯤이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여유롭게 게이트에 도착해 주었다. 내가 탄 케세이 퍼시픽 항공사의 비행편은 홍콩을 거쳐 런던에 저녁 9시쯤 도착하는 일정이었는데 장시간 비행은 처음이라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NIKON D90 | Manual | 1/160sec | F/3.5 | 0.00 EV | 18.0mm | ISO-320 | 2010:08:19 14:17:45NIKON D90 | Manual | 1/1250sec | F/3.5 | 0.00 EV | 18.0mm | ISO-320 | 2010:08:19 14:59:04

홍콩공항에서 시원한 망고주스 한 잔 마시면서 파리 여행책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시계를 보니 회사에 있었으면 점심 먹고 나서 한창 졸면서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비행기로 두 시간 여를 날아왔을 뿐인데 이미 내 주변엔 한국 사람은 없고 들리는 말이라고는 영어와 중국어 밖에 없었다. 세상은 이리도 넓은데 나는 1년 365일을 그 좁은 서울에서만 살아왔다는 사실이 조금은 안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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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런던까지 날아가는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부모님 생각, 동생 생각, 친구들 생각, 지나간 사랑 생각,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생각... 어둡고, 춥고, 긴 터널처럼 느껴졌던 그 시간에 난 그렇게 한국에 두고 온 많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도 내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영국에 거의 도착할 때쯤 먹었던 따뜻한 컵라면이 서늘했던 내 몸과 마음을 녹여주었다.

내리기 전에 공항에서 호텔까지 가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문득 지하철이 밤새도록 운행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이 떠올랐다. 게다가 비행기는 연착되어 밤 10시가 넘어서야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으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 여행하는데 이 정도 스릴은 있어야 재밌지!

한밤중에 런던 시내를 헤맨 사연은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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